여행으로 극복한 나의 슬럼프 이야기

목차

1. 무기력의 끝에서: 나를 집어삼킨 슬럼프의 정체
2. 떠나기로 결심하다: 여행이라는 탈출구
3. 새로운 환경, 낯선 자극: 여행지에서 마주한 나
4. 일상과의 거리두기: 재정비의 시간이 된 여행
5. 생각의 전환점: 변화는 예고 없이 다가온다
6. 돌아온 이후의 나: 여행이 남긴 진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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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기력의 끝에서: 나를 집어삼킨 슬럼프의 정체

슬럼프는 예고 없이 찾아왔고, 나를 점점 무기력의 늪으로 끌어내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고통이 되었고, 늘 하던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피하게 되고, 좋아하던 취미들조차 의미 없어졌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속은 지쳐 있었고, 무언가 큰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만 반복되었다. 이 시기, 나는 심리적으로 ‘정체된 시간’을 살고 있었다. 특히 창작과 기획을 반복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창의적 에너지가 고갈될수록 무능력감은 더 깊어졌다. 자기계발서, 상담 앱, 운동, 명상 등 시도해본 해결책들은 순간의 회복을 주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았다.

내가 겪은 슬럼프는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정체성과 방향성을 잃어버린 ‘삶의 공백기’였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시기를 겪지만, 이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로 착각한 채 더 깊이 빠져든다. 나는 마침내 이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여행이었다.

 

2. 떠나기로 결심하다: 여행이라는 탈출구

갑작스러운 결심은 아니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제는 실행이었다. 일, 책임, 관계 등 수많은 이유가 발목을 잡았지만, 그 어느 것도 나를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결국 나는 스스로를 우선순위에 두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한 목적지는 고의로 ‘아무 연고 없는 도시’였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감정이 강했기 때문이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 간단한 짐만 챙긴 뒤 떠난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내 삶을 다시 세팅하고 있었다.

계획도 목적도 없이, 오직 ‘이 낯선 감정들을 흔들어줄 어떤 것’을 기대하며 여행길에 올랐다. 출발 전부터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무력감의 흐름은 멈출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 여행은 단순한 휴가가 아니었다. 내 삶을 다시 읽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었고, 스스로를 위한 유일한 투자였다. 그 선택이 얼마나 강력한 회복의 도구였는지는 여행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체감되었다.

 

3. 새로운 환경, 낯선 자극: 여행지에서 마주한 나

도착한 도시는 아시아의 작은 해안 도시였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낯선 곳이었지만, 그만큼 내 모든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걸 느꼈다. 바다 냄새, 이국적인 음식 향, 낮선 언어가 섞인 거리의 소음까지—그 무엇도 내가 익숙해하던 것들과 닮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낯섦이 위로가 되었다. 일상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했기에 삶이 고장 나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낯선 자극 속에서 나는 계속 관찰하고 반응하며, 그 자체로 다시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겼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웃게 되었고, 이름 모를 작은 카페에 앉아 손글씨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를 짓눌렀던 책임과 기대의 껍질을 벗고, 순수하게 순간을 느끼고 기록하는 그 경험은 오래된 나를 다시 깨우는 작업이었다. 내가 나를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여행은 내면의 공간을 리셋시키는 '심리적 재부팅'이었다.

 

4. 일상과의 거리두기: 재정비의 시간이 된 여행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거리두기'였다. 나는 여행 중 일부러 인터넷 사용을 줄이고, 메시지와 알림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단순한 디지털 디톡스가 아니라 ‘외부 피드백 없이 나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이었다. 여행 중 만난 현지인과의 짧은 대화,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고른 책, 거리에서 마주친 노인의 인생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지금까지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나를 자극했다. 나는 작은 노트에 하루의 감정을 정리하고, 무엇이 나를 슬럼프에 빠뜨렸는지, 무엇이 그 슬럼프에서 나를 꺼내는지 적어나갔다.

여행은 의도하지 않아도 사고의 틀을 바꾸게 만든다. 공간이 바뀌고, 시간 감각이 뒤틀리며, 익숙한 나 자신을 새롭게 관찰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행은 일상의 프레임을 해체하고, 새로운 삶의 구조를 상상하게 하는 가능성의 통로였다.

 

5. 생각의 전환점: 변화는 예고 없이 다가온다

여행이 중반을 지나며 슬럼프에 대한 감정은 점점 흐려졌다. 그 자리에는 ‘변화’라는 단어가 자리 잡았다. 변화란 거창한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다르게 해보는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카페에 가서 새로운 음식을 주문했고, 낯선 골목을 무작정 걸었으며, 그 도시의 음악을 배경 삼아 하루를 마무리했다. 과거의 나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았지만, 이 여행에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느긋함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된 꿈이 다시 살아났다.

변화는 항상 큰 계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전환점에서 조용히 자라난다. 내가 겪은 여행은 그런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중요한 것은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삶은 슬럼프라는 늪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6. 돌아온 이후의 나: 여행이 남긴 진짜 변화

여행은 끝났지만, 나의 일상은 전과 같지 않았다. 물론 다시 바쁜 업무와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그 일상이 나를 갉아먹지 않았다. 여행 중에 만들었던 아침 일기 루틴을 유지했고, 집 안에는 여행지에서 사온 향초와 엽서들이 나를 감각적으로 자극해주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더 이상 모든 일에 완벽하려 하지 않았고, 피로하거나 혼란스러울 땐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여행은 일시적인 도피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깊은 호흡이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무언가를 꿈꾸게 되었고, 그 꿈은 다시 나를 움직이게 했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것을 회복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나에게 여행은 단순한 탈출이 아닌 ‘나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유연한 사람이 되었다. 여행은 나를 바꾸지 않았다. 내가 나를 바꾸기 시작한 그 순간에, 여행이 곁에 있었을 뿐이다.